THREAD: Bound by Fate
Ji Hyunjung
Solo Exhibition
지현정 개인전
2025. 7. 23 (수) - 2025. 8. 23 (토)
K-LIZ Gallery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실들이 엮어내는 관계와 기억의 풍경을 그리는 아티스트 지현정의 개인전 THREAD: Bound by Fate를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는 운명처럼 얽힌 인연의 실(THREAD)을 따라 아티스트의 깊고 섬세한 내면 세계를 탐색하는 특별한 여정으로 관객을 초대합니다. 지현정 작가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의 실'이 만들어내는 연결과 얽힘, 단절과 이별까지, 감정이 엮어내는 섬세한 이야기들을 화면 위에 펼쳐내고자 했다"고 하였습니다.
작가에게 '실'은 감정의 흐름, 기억의 흔적, 관계의 연결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모티브입니다. 작가는 "땋은 머리는 감정, 정체성, 시간이 엮여 만들어진 하나의 풍경"이라 설명하며,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삶을 촘촘히 엮고 있는 그 연결의 흔적을 좇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 이면에 섬세한 긴장감을 담아내는 작가의 작품 세계는 삶과 감정의 복합적인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작가는 "아름다움 속에 불안이 있고, 평온한 장면에도 상처가 숨어 있다"며, "관객이 그림을 보면서 '왜 이토록 아름다운데 왠지 모르게 아프지?'라고 느낀다면, 그건 제가 전하고자 한 감정에 닿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녀의 형상은 작가 자신이면서 동시에 관객과 감정을 공유하는 매개체입니다.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한 인물들의 시선은 감정 속으로 깊이 몰입하는 '조용한 성찰'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꼭 해석하지 않아도 좋아요. 다만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추고, 자신만의 감정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그게 슬픔이든, 따뜻함이든,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이든요. 제 그림이 누군가의 내면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는 동양화의 선과 서양 회화의 색,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의 감성이 어우러진 지현정 작가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관객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고요하고 깊은 성찰의 시간을 제공할 것입니다.
(전시 비평)
감성의 풍경 : 지현정의 예술 세계
이안 로버트슨 박사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前 런던 소더비 인스티튜트 미술 비즈니스 학과장
영국의 작가 C.S. 루이스(1898-1963)는 1960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네 가지 사랑』에서 네 가지 근원적인 사랑의 형태를 탐구했다: 아가페(agape, 이타적이고 형제애적인 사랑), 에로스(eros, 열정적인 사랑), 필리아(philia, 우정), 그리고 스토르게(storge, 가족애)가 그것이다. 지현정 작가는 이 네 가지 사랑 모두에 관심을 보인다. 관계, 정서적 유대, 그리고 기억의 복잡한 결을 선과 색을 통해 탐구하는 그녀의 방식은 우리를 무장 해제시킨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낭만에 대한 피상적이고 유아적인 항해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는 빅토리아 시대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96) 경의 후기 아동 초상화와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오브리 비어즐리(1872-1898)의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때로는 고뇌에 차고, 때로는 숭고하며, 언제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선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으며, 머리카락의 흐름은 마치 물결처럼 보이고, 각각의 가닥은 하나의 연쇄체를 이룬다. ‘보이지 않는 실(Thread Unseen)’에서 천사와 같은 날개 달린 아이는 우리 앞에 웅크리고 있으며, 그 머리카락은 몸을 감싸고 화면 밖으로 뻗어 나간다. 그림의 왼쪽 하단과 오른쪽 상단에는 별이 빛나는 밤을 배경으로 한 두 개의 간청하는 손이 뻗어 나와 떠다니는 잎사귀들과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이 작품은 우주적 충만감과 함께 역설적으로 무기력(acedia)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마찬가지로 '뱀의 속삭임(The Serpent’s Whisper)' 속, 암묵적인 동조를 보이는 뱀과 얽혀 누워있는 소녀는 에덴동산의 루시퍼를 상기시키며 쾌락적으로 보인다. 아름답게 묘사된 꽃과 다채로운 잎으로 만들어진 화관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동시에 나태한 분위기를 더한다. 그렇다면 이 두 작품은 자기몰두의 시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상징하는 것일까? '고요한 호수 위의 두 시선(Two gazes over the silent lake)' 속 얽혀있는 소녀의 시선은 서울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소녀의 공허하고 영혼 없는 응시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은 장엄한 한 쌍의 백조와 전경의 갈대밭의 황금빛 깃털이 두 인물과 균형을 이루며, 이번 전시에서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적갈색 수련들이 배경으로 멀어지면서 원근감이 느껴진다.
지현정은 우타가와 호쿠사이(1760-1849)를 자신의 양식에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으로 꼽는데, 이는 상처 입은 마음을 신랄하게 암시하는 작품 '꽃 아래, 상처는 잠들고(Under the Blossoms, the Wound Sleeps)'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상처는 자연의 심장일 수도, 인류의 심장일 수도 있다. 나무줄기의 핏빛 자국과 그것이 젊은 여성과 맺는 관계는 이 그림이 둘 모두를 지칭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모든 피상적인 아름다움 속에는 냉소주의가 깔려있다. 섬세하고 생생한 전경의 꽃들은 인류의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라는 메시지를 감추고 있다. 추함과 아름다움 사이의 강렬한 대립이야말로 이 작품들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침묵의 약속(Silent Promises)’이라는 작품에서 소녀는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 앉아 있는데, 머리카락은 떠다니는 소라 껍데기 형태를 이루며 일상의 가혹함으로부터 인물을 보호한다. 물은 머리카락 위로 흘러내리며 결국 이 장애물을 침식할 것이다. 여기서 액체는 삶의 흐름과, 부정이 영원한 움직임을 통해 어떻게 바로잡힐 수 있는지에 대한 은유이다. 이는 19세기 소설가 엘리자베스 개스켈(1810-1865)의 소설 『메리 바튼』에서 메리가 한 말과 같다. "아! 고통의 시기에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무한한 축복이라고 생각해. 비록 그 첫 노력은 고통스럽지만.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성취될 수 있는 좋은 일이 아직 남아있거나, 피할 수 있는 추가적인 악이 있다는 희망을 의미하지. 그리고 점차 그 희망이 슬픔의 많은 부분을 흡수하게 돼."
양식적으로 지현정의 예술은 대만계 미국인 작가 제임스 진(b.1979)의 작품과 비교될 수 있으며, 진이 보여주는 장인정신(shokunin)과 세부에 대한 집요함은 지현정의 세심하게 렌더링된 캔버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한지(Hanji)와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녀의 밑그림은 매우 확신에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진처럼 지현정도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깊이 숙고하며, 이미지를 결합하는 순간 그 의미를 해독해 나간다. 그녀의 선은 기억으로 충만한 감정의 흐름이다. 기억이라는 프리즘과 꿈의 호수를 통해 지현정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이는 그녀를 실존주의자라기보다는 초현실주의자로 만들며, 잠재의식의 영역에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한다. 나는 이 환상들을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깊이 개인적인 것이어서 접근하기 어렵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이미지들에 정보를 제공하는 포괄적인 철학을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에 대한 에세이가 자아 분석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예술이 주관적 무의식보다는 집단적 무의식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 작품들은 보편적 감정의 저장소로서의 무의식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련의 작업이다.
또 다른 정교한 작품인 '달밤(Moonlite night)'에서 작가의 열정은 구름과 파도로 변모한다. 줄기와 여성의 형상은 인류와 자연이라는 이중적 소망에 실체를 부여한다. 이 그림에서 물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창공으로 전달하는 통합적인 요소이다. 모든 것이 상당 부분 모호하다. 물과 하늘은 서로 바뀔 수 있으며, 우리 내면세계의 복잡한 흐름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어떤 경우에는 궁극적으로 정서적 무감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작가가 선언하듯이, 사실 이 작품들은 복잡한 감정들을 처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색의 공간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바로 그 감정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시도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말했는데, 이는 사람의 가장 높은 수양의 경지는 물의 성질을 모방할 수 있을 때임을 의미한다. 노자는 "물은 아래로 흐르며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물이 닿지 못하는 곳은 없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말했다. 노자가 '도(道)'라고 여긴 것은 바로 이러한 편재성이다. '기억이 헤엄치는 곳(Where Memories Swim)'이라는 그림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도가적인 작품이다. 이는 자연의 흐름과 함께 내면적으로 살아가는 궁극적인 삶의 형태에 대한 선언이다. 같은 주제는 '바람의 정원(The Garden of Wind)'에서도 반복되는데, 여기서 물고기들은 다시 한번 자연의 풍요로움을 통해 어린 소녀들을 상징적으로 이끈다.
물이 그녀 작품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노자의 가르침에 대한 지현정의 영향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노자는 "물은 가장 부드러운 것이지만, 산과 땅을 꿰뚫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는 원리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아마도 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 중 이 경우에 가장 적절한 인용구는 이것일 것이다: "당신의 꿈에 무엇으로 물을 주는지 조심하라. 걱정과 두려움으로 물을 주면 꿈의 생명을 앗아가는 잡초를 키우게 될 것이다. 낙관과 해결책으로 물을 주면 성공을 일구게 될 것이다." 나는 물의 부드러움과 바위처럼 단단한 물체를 이기는 그 힘이, 지현정의 예술에서는 남성성을 능가하는 여성성의 부드러움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점차적으로 부드러움은 단단함을 해소할 것이다. 이 그림들 속 소녀들의 조용하고 액운을 쫓는 듯한 여정은 선을 향한 힘, 천상과 지상의 통합을 위한 힘, 요컨대 삶 자체의 긍정을 위한 힘이다.
실존주의적 사고방식을 채택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의 부활은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여러 면에서 실존주의는 이 예술의 적이다.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으며, 우주는 의미도, 감정도, 감수성도 없는 입자들의 집합일 뿐이라는 개념은 심히 우울하다. 자코메티는 서 있는 인물 조각상에서 이러한 관점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했다. 가늘고 긴 인간 형태의 이 열띤, 꿈결 같은 청동상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상징적으로 굶주린 인물들이다. 그들은 식별할 만한 특징도, 동일시할 만한 것도 없으며, 본질적으로 엘리엇의 '속 빈 인간들(hollow men)'이다. 나는 지현정이 실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은 위협적이기보다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실존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초월이 자아를 구성한다'고 썼고, 어떤 면에서 지현정의 이 그림들은 초월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숭고함을 통해 작가는 자신을 알게 된다.
'속삭이는 정원(The Whispering Garden)'이라는 그림은 햇볕에 그을린 듯한 여성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정자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쌍의 다정한 새가 우울하게 웅크린 인물 위에 후광처럼 자리하고 있다. 지현정의 많은 그림에서 나타나는 소녀의 구속된 자세는 감정적으로 억압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내면적으로 교감하기를 감히 꺼리는 듯 관객으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대신, 작가는 내면의 감정을 억누르는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한 성찰의 상태를 포착하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느리고 신중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과 교감한다. 그들의 감수성은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신중하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보는 끊임없는 행위이다. 요컨대, 이는 비록 미묘하지만 심오한 감정 처리 방식에 대한 증거이다. '사랑의 뜨개질(Knit of Love)'이라는 제목의 두 작품은 사랑의 공허함을 암시하며, 그 자리를 일회적이고 가벼운 감정의 상징인 이모티콘으로 대체하는 듯 보인다. 카즈사 마츠야마(b.1992)처럼, 지현정 역시 왜곡된 감정과 모호한 묘사를 통해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동서양 미학 체계의 측면들을 한데 모은다. 벚꽃 잎의 짧은 생으로 상징되는 이러한 '뜬세상(浮世, Floating World)'의 묘사는 두 화가 모두의 예술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현대적 우키요에(Ukiyo-e) 세계의 비영구성, 덧없음의 스릴, 그리고 개인의 무의미한 존재는 지현정 예술의 중심 주제이다. 이 삶은 우키요에 세계의 슬픔과 지상의 고통,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즐거움이 불편하게 융합된 것이다.
지현정의 '실 풍경(Thread-scape)' 연작은 단절된 감정 생활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든 긴장과 좌절을 보여준다. 땋은 머리카락 매듭의 거친 느낌, 꽃으로 구성되고 강렬한 감정을 전달하는 전기적인 색채로 물든 만다라는 다소 불안감을 준다. 마치 피상적인 감정 표현이 진실한 감정을 대신하고, 현실이 아닌 잘 짜인 각본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사실 가부키, 분라쿠, 그리고 말 그대로 '뜬세상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우키요조시(Ukiyo-zoshi)의 세계로 들어선 것일까? 나는 지현정의 예술에서 우타가와 쿠니사다(1786-1865)의 작품을 많이 본다. 이 '뜬세상'의 최종적인 표현은 일본화(Nihon-ga)와 그 현대적 표현인 네오-니혼가(Neo-Nihon-ga)라는 예술 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전시의 모든 그림에서 나타나는 색의 비현실성은 또 다른 세계를 암시한다.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는 중국의 '봉래(蓬萊, penglai)' 개념과 함께, 냉소적 사실주의 예술가 팡리쥔(b.1963)의 특정 작품 '소외된 낙원(An estranged Paradise)'(1997-2002)이 떠오른다.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신들의 거처인 봉래, 즉 낙원을 멍청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필멸자들로 과밀하게 묘사한다. 이는 우리가 신선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을 조롱할 때 삶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악몽이다. 오히려 우리는 장자의 말처럼, 자연을 거스르지 않음으로써 얻는 평온의 세계에 살아야 한다. 형식적인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영적 자유를 추구하며 여유롭고 거리낌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세계 말이다.
작가는 이 작품들이 자전적인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수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 소녀들에게서 화가의 모습을 보지 않기는 어렵다. 하지만 만약 그 인물이 정말로 다른 존재라면, 아마도 그것은 아바타이거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무엇, 어쩌면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그 구성이 무엇이든 간에, 땋은 머리카락과 흐르는 물을 통해 표현되는 꿈, 환상, 그리고 영적 예리함을 통한 어린 소녀의 여정은 도가적 탐구와 '뜬세상'의 재현이 융합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그림들은 피상적으로 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연과 인류에 대한 시적인 비가(悲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성장의 가능성, 즉 공감의 가능성과 용서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